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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본(4.5.6급)

[한능검 기본] 5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by tory_write 2021. 10. 13.

<< Ⅰ. 수와 당 침략 물리친 고구려 >>

1.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

1) 중국

- 가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통일했다.(589)

나라 멸망이 건국됐다.

 

 

2) 한반도

- 신라한강 유역을 차지하며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3) 결과

- 남북 진영(돌궐, 고구려, 백제, 왜)와

동서 진영(수·당, 신라)이 대립했다.

 

[사진 1] 6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정세

 

 

2. 고구려와 수의 전쟁

1) 배경

- 중국을 통일한 고구려굴복요구했다.

 

 

2) 과정

- 고구려가 요서 지방을 공격  수 문제 침략

고구려가 격퇴시킴(598)

 

- 살수대첩(612): 수 양제가 고구려 침략 

요동성 공격 실패 

수의 30만 별동대 평양성 공격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 살수(청천강)에서 의 대군 대패

 

- 살수 대첩 후 몇 차례에 걸친 공격고구려가 모두 격퇴했다.

 

 

[사진 2] 살수대첩(수 VS 고구려)

 

 

3) 결과

- 는 무리한 전쟁으로 국력소모했다.

- 전국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수 멸망했다.(618)

 

 

 

3. 고구려와 당의 전쟁

1) 고구려와 당의 관계 변화

- 초기: 사신을 교류하며 친선 관계 유지했다.

 

- 변화: 당 태종 즉위 후 고구려에 압력을 넣었다.  고구려천리장성을 쌓아 당의 침입에 대비했다.

 

 

[사진 3] 당 침입 대비해 천리장성 쌓은 고구려

 

 

2) 연개소문의 정변

- 연개소문권력을 차지 후 보장왕 왕위에 세웠다.  백제연합하여 신라공격했다. 강경정책을 추진했다.

 

3) 당의 침입

-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당 태종침입했다. 요동성과 백암성 등이 함락되고 안시성공격했다. 당군을 물리쳤다.(안시성 싸움, 645)

 

 

[사진4] 안시성 싸움(당 VS 고구려)

 

 

 

4. 의의

중국의 한반도 침략저지했다.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방파제 역할했다.

 

 


 

 

[사진 5] 7세기 동아시아 격변

 

 

<< . 신라의 삼국 통일 >>

1. 7세기 초 삼국의 상황

1) 고구려

- 수, 당전쟁을 계속했다.

- 연개소문독재를 했다.

 

 

2) 백제

- 의자왕이 신라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을 빼앗았다.

 

 

3) 신라

- 김춘추고구려에 도움을 요청 실패 동맹을 체결(648)

 

(이때 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기 때문에 신라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였다.)

 

 

 

2. 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

1) 멸망

-  나·당 연합군의 공격 계백황산벌 전투 패배 사비성 함락(660)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를 물리쳤다.)

 

 

2) 부흥 운동

-  흑치상지(임존성), 복신과 도침(주류성)이 왕자 풍을 내세워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  지원군을 파견하여 백강(금강)에서 전투했다. 나·당 연합군에 패배했다.

 

 

 

3.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 운동

1) 배경

- 수·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됐다.

- 연개소문이 죽은 후 지배층 내분 발생했다.

 

2) 멸망

-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평양성함락.(668)

 

3) 부흥 운동

- 고연무, 검모장, 안승이 주도했지만 지배층내분으로 실패했다.

 

 

 

4. 신라와 당의 전쟁

1) 당의 야심

- 백제(웅진도독부), 고구려(안동도호부), 신라(계림도독부)에 통치 기관을 설치했다.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다.

 

[사진 6] 신라 VS 당

 

 

2) 신라의 대응

-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포섭했다. 안승을 보덕국의 왕으로 임명하여 당에 저항했다.

 

- 옛 백제 땅을 되찾은 후 매소성기벌포 싸움에서 승리했다. 통일을 완성했다.(676)

 

 

 

5. 삼국 통일의 의의 및 한계

1) 의의

-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이었다.

-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2) 한계

- 외세(당)를 이용했다.

- 대동강 이남한정된 통일이었다.

 

[사진 7] 삼국 통일 지도

 

 

 

<< Ⅲ. 통일 신라의 발전 >>

1. 강력한 왕권의 확립

1) 무열왕

- 최초의 진골 출신 으로 이후 무열왕 직계 자손이 왕위를 계승했다.

 

 

2) 문무왕

- 당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성했다.

 

 

3) 신문왕

- 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강화했다.

- 관료전지급하고 녹읍폐지했다.

 

** 녹읍: 나랏일을 하는 관리에게 지급한 토지로 세금을 거둘 수 있을 뿐 아니라 농민을 데려다 일을 시킬 수도 있었다. 경덕왕 때 부활했다.

 

- 국학설치했다.

 

 

 

2. 새로운 통치 제도 마련

1) 중앙 정치

- 집사부의 시중(중시)의 권한 강화했다.

- 화백 회의와 상대등권한약화됐다.

 

 

2) 지방 행정

-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과 현을 두었다.

- 지방의 중심지에 5소경을 설치했다.

9주 5소경

 

[사진 8] 통일신라, 9주 5소경

 

 

3) 군사 제도

- 9서당(중앙군)과 10정(지방군)을 설치했다.

9서당 10정 

 

 

 

<< . 발해 >>

1. 건국(698)

1) 배경

-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에 끌려가 살게 되었다. 거란족반란

 

 

2) 대조영

- 고구려 유민말갈족을 이끌고 지린성 동모산에서 발해건국했다.

 

쪽의 신라쪽의 발해가 함께하는 남북국 시대가 성립됐다.

 

[사진 9] 남북국 시대

 

 

2. 발전

1) 무왕

- 만주 북부 지역을 차지하여 영토확장했다.

- 적대적 관계로 당의 산둥지방 공격했다.

- 일본교류를 시작했다.

- 돌궐친선 관계 맺고 신라견제했다.

-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중국대등한 관계임을 나타냈다.

 

2) 문왕

- 친선 관계를 맺어 문물 수용했다.

- 신라와 발해 사이에 교통로신라도를 설치했다.

-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일본과 외교에서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 표현

 

[사진 10] 발해와 신라 무역로

 

 

3) 선왕

- 고구려의 옛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 발해의 전성기 당은 발해를 '해동성국' 이라 불렀다.

** 해동성국: 바다 건너 동쪽의 번성한 나라라는 의미

 

 

 

3. 멸망(926)

1) 원인

- 지배층내분으로 국력이 약화됐다.

- 거란 세력이 확장했다.

 

 

2) 멸망

- 거란침략으로 멸망했다. 왕족을 비롯한 일부 유민이 고려망명했다.

 

 

 

4. 발해의 통치 제도

1) 중앙 행정 기구

- 의 제도를 본떠 3성 6부를 설치했다.

독자성을 유지했다.

 

 

2) 지방 행정 기구

- 5경 15부 62주를 설치했다.

말단 조직인 촌은 촌장지배했다.

 

 

 

<<. 신라의 동요와 후삼국의 성립 >>

1. 신라 말 정치 혼란

1) 왕위 쟁탈전

- 혜공왕 이후 150여 년간 20명교체 됐다.

일부 진골 귀족에게 권력집중되어 대립과 갈등이 심해졌다.

 

 

2) 사회 혼란

-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약화됐다.

→ 지방에서 반란(김헌창의 난) 발생했다

** 김헌창의 난: 김헌창은 신라 왕족으로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지금의 충남 공주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사진 11] 신라 말, 사회 동요

 

 

 

2. 지방 호족의 등장

1) 등장

-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 부르며 지방행정권·군사권·경제권을 장악했다.

 

 

2) 출신

-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촌주

- 중앙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지방으로 내려온 세력

-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군대 지휘관

- 무역으로 재산군사력을 키운 세력

 

 

 

3. 6두품 세력의 반발

1) 배경

- 중앙 귀족이면서도 진골 귀족밀려 관직 승진제한됐다.

 

 

2) 반발

- 골품제모순을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 했다.

진골 귀족반대로 개혁이 좌절됐다.

호족 세력과 함께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했다.

 

 

 

4. 농민의 움직임

1) 생활 악화

- 9세기 말 진성 여왕흉년, 전염병 유행, 각종 세금증가했다.

 

 

2) 농민 봉기

- 원종과 애노의 난, 적고적(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의 봉기가 발생했다.

 

** 원종과 애노의 난: 지금의 경북 상주에서 원종,애노가 일으킨 농민 봉기

 

 

 

5. 후삼국의 성립

1) 후백제 건국(900)

- 견훤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했다.

-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서부 지역을 장악

 

2) 후고구려 건국(901)

- 신라 왕족 출신 궁예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삼고 국가를 건설했다. 

 

-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고치며 체제를 정비했다.

 

[사진 12] 후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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