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수와 당 침략 물리친 고구려 >>
1.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
1) 중국
- 수가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했다.(589)
→ 수나라 멸망 후 당이 건국됐다.
2) 한반도
-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며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3) 결과
- 남북 진영(돌궐, 고구려, 백제, 왜)와
동서 진영(수·당, 신라)이 대립했다.
2. 고구려와 수의 전쟁
1) 배경
- 중국을 통일한 수가 고구려에 굴복을 요구했다.
2) 과정
- 고구려가 요서 지방을 공격 → 수 문제의 침략
→고구려가 격퇴시킴(598)
- 살수대첩(612): 수 양제가 고구려 침략
→ 요동성 공격 실패
→ 수의 30만 별동대 평양성 공격
→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 살수(청천강)에서 수의 대군 대패
- 살수 대첩 후 몇 차례에 걸친 수의 공격을 고구려가 모두 격퇴했다.
3) 결과
- 수는 무리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했다.
- 전국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수 멸망했다.(618)
3. 고구려와 당의 전쟁
1) 고구려와 당의 관계 변화
- 초기: 사신을 교류하며 친선 관계 유지했다.
- 변화: 당 태종 즉위 후 고구려에 압력을 넣었다. →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당의 침입에 대비했다.
2) 연개소문의 정변
- 연개소문이 권력을 차지 후 보장왕 왕위에 세웠다. →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 당에 강경한 정책을 추진했다.
3) 당의 침입
-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당 태종이 침입했다. → 요동성과 백암성 등이 함락되고 안시성을 공격했다. → 당군을 물리쳤다.(안시성 싸움, 645)
4. 의의
중국의 한반도 침략을 저지했다.
→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방파제 역할했다.
<< Ⅱ. 신라의 삼국 통일 >>
1. 7세기 초 삼국의 상황
1) 고구려
- 수, 당과 전쟁을 계속했다.
- 연개소문이 독재를 했다.
2) 백제
-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3) 신라
-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 → 실패 → 당과 동맹을 체결(648)
(이때 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기 때문에 신라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였다.)
2. 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
1) 멸망
- 나·당 연합군의 공격 → 계백의 황산벌 전투 패배 → 사비성 함락(660)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를 물리쳤다.)
2) 부흥 운동
- 흑치상지(임존성), 복신과 도침(주류성)이 왕자 풍을 내세워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 왜가 지원군을 파견하여 백강(금강)에서 전투했다. → 나·당 연합군에 패배했다.
3.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 운동
1) 배경
- 수·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됐다.
- 연개소문이 죽은 후 지배층 내분 발생했다.
2) 멸망
-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평양성이 함락.(668)
3) 부흥 운동
- 고연무, 검모장, 안승이 주도했지만 지배층의 내분으로 실패했다.
4. 신라와 당의 전쟁
1) 당의 야심
- 백제(웅진도독부), 고구려(안동도호부), 신라(계림도독부)에 통치 기관을 설치했다. →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다.
2) 신라의 대응
-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포섭했다. → 안승을 보덕국의 왕으로 임명하여 당에 저항했다.
- 옛 백제 땅을 되찾은 후 매소성과 기벌포 싸움에서 승리했다. → 통일을 완성했다.(676)
5. 삼국 통일의 의의 및 한계
1) 의의
-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이었다.
-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2) 한계
- 외세(당)를 이용했다.
-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통일이었다.
<< Ⅲ. 통일 신라의 발전 >>
1. 강력한 왕권의 확립
1) 무열왕
-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이후 무열왕 직계 자손이 왕위를 계승했다.
2) 문무왕
- 당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성했다.
3) 신문왕
- 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했다.
** 녹읍: 나랏일을 하는 관리에게 지급한 토지로 세금을 거둘 수 있을 뿐 아니라 농민을 데려다 일을 시킬 수도 있었다. 경덕왕 때 부활했다.
- 국학을 설치했다.
2. 새로운 통치 제도 마련
1) 중앙 정치
- 집사부의 시중(중시)의 권한을 강화했다.
- 화백 회의와 상대등의 권한이 약화됐다.
2) 지방 행정
-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과 현을 두었다.
- 지방의 중심지에 5소경을 설치했다.
→ 9주 5소경
3) 군사 제도
- 9서당(중앙군)과 10정(지방군)을 설치했다.
→ 9서당 10정
<< Ⅳ. 발해 >>
1. 건국(698)
1) 배경
-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이 당에 끌려가 살게 되었다. → 거란족의 반란
2) 대조영
-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지린성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했다.
→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함께하는 남북국 시대가 성립됐다.
2. 발전
1) 무왕
- 만주 북부 지역을 차지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 당과 적대적 관계로 당의 산둥지방 공격했다.
- 일본과 교류를 시작했다.
- 돌궐과 친선 관계 맺고 당과 신라를 견제했다.
-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나타냈다.
2) 문왕
- 당과 친선 관계를 맺어 문물을 수용했다.
- 신라와 발해 사이에 교통로인 신라도를 설치했다.
-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 일본과 외교에서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 표현
3) 선왕
- 고구려의 옛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 발해의 전성기 → 당은 발해를 '해동성국' 이라 불렀다.
** 해동성국: 바다 건너 동쪽의 번성한 나라라는 의미
3. 멸망(926)
1) 원인
- 지배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약화됐다.
- 거란 세력이 확장했다.
2) 멸망
-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 왕족을 비롯한 일부 유민이 고려에 망명했다.
4. 발해의 통치 제도
1) 중앙 행정 기구
- 당의 제도를 본떠 3성 6부를 설치했다.
→ 독자성을 유지했다.
2) 지방 행정 기구
- 5경 15부 62주를 설치했다.
→ 말단 조직인 촌은 촌장이 지배했다.
<<Ⅴ. 신라의 동요와 후삼국의 성립 >>
1. 신라 말 정치 혼란
1) 왕위 쟁탈전
- 혜공왕 이후 150여 년간 20명 왕 교체 됐다.
→ 일부 진골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대립과 갈등이 심해졌다.
2) 사회 혼란
-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됐다.
→ 지방에서 반란(김헌창의 난) 발생했다
** 김헌창의 난: 김헌창은 신라 왕족으로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지금의 충남 공주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2. 지방 호족의 등장
1) 등장
-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 부르며 지방의 행정권·군사권·경제권을 장악했다.
2) 출신
-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촌주
- 중앙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지방으로 내려온 세력
-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군대 지휘관
- 무역으로 재산과 군사력을 키운 세력
3. 6두품 세력의 반발
1) 배경
- 중앙 귀족이면서도 진골 귀족에 밀려 관직 승진에 제한됐다.
2) 반발
-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 했다.
→ 진골 귀족의 반대로 개혁이 좌절됐다.
→ 호족 세력과 함께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했다.
4. 농민의 움직임
1) 생활 악화
- 9세기 말 진성 여왕 때 흉년, 전염병 유행, 각종 세금이 증가했다.
2) 농민 봉기
- 원종과 애노의 난, 적고적(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의 봉기가 발생했다.
** 원종과 애노의 난: 지금의 경북 상주에서 원종,애노가 일으킨 농민 봉기
5. 후삼국의 성립
1) 후백제 건국(900)
- 견훤이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했다.
-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서부 지역을 장악
2) 후고구려 건국(901)
- 신라 왕족 출신 궁예가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삼고 국가를 건설했다.
-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고치며 체제를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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