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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본(4.5.6급)

[한능검 기본] 10 원의 간섭과 새로운 세력의 등장

by tory_write 2021. 10. 19.

<< Ⅰ. 원의 내정 간섭>>

1. 원 간섭기 고려의 상황

1)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후 독립국 지위 유지했지만 원의 내정 간섭이 시작됐다.

 

2) 원은 고려의 제도풍속인정했다.

고려에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했다.

 

 

2. 원의 부마국이 된 고려

1) 고려 왕실의 호칭과 관제 격하

- 왕의 묘호종·조를 ''으로 고치게 했다.

**묘호: 황제나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호.

 

-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자를 앞에 붙였다.

충렬왕, 충선왕

 

- 관직 이름격이 낮아졌다.

중추원밀직사, 어사대감찰사, 6부4사

 

**부마국: 부마는 임금이 사위를 뜻하는 말. 세자가 원의 공주와 혼인하여 고려 왕원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2) 영토 상실

- 고려 북방 지역에 쌍성총관부·동녕부, 제주도탐라 총관부를 설치했다.

**탐라총관부: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하고 설치.

 

[사진 1] 쌍성총관부

 

 

 

3) 일본 침략에 동원

- 일본 침략에 고려의 물자요구했고, 군대가 동원됐다.

**일본 침략: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태풍 등으로 실패.

 

- 정동행성설치했다. 일본 침략 후에는 고려내정간섭하는 데 이용됐다.

**정동행성: 충렬왕 6년(1280)에 원이 일본 침략하고자 고려의 개경설치한 기구. 일본 침략 계획을 그만둔 뒤로는 원의 관리를 두어 고려내정 감시하고 간섭하였다.

 

 

4) 물적·인적 자원 수탈

- 물적 수탈: 원은 고려에 금, 은, 인삼, 매 등 특산물징수했다.

- 인적 수탈: 고려의 처녀를 공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했다.

 

 

5) 고려와 원의 문물 교류

- 몽골풍: 고려에 몽골어, 몽골식 복장과 머리 모양 등 몽골 풍습유행했다.

- 고려양: 몽골에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 고려 풍습전래했다.

 

**몽골풍: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 글자 '치'에서 유래한 벼슬아치와 장사치, 몽골 궁중 용어의 왕에게 올리는 밥을 뜻하는 수라, 궁중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종을 뜻하는 무수리 등이 사용되었고, 몽골 음식 중 만두, 소주 등이 고려에 소개되었다.

 

[사진 2] 몽골풍 영향, 소줏고리
[사진 3] 몽골풍 영향, 만두

 

 

<< . 권문세족의 성장>>

1. 친원 세력의 등장

1) 배경

- 원 간섭기 배경으로 권세 누리는 지배 세력이 등장했다.

 

2) 출신

- 몽골 침입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

 

- 고려 왕자가 원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함께 생활하였던 사람들.

 

- 응방의 관리 등 원과 관련된 일을 하던 사람들.

**응방: 원에 바칠 매를 사육하던 기관.

 

- 기철의 가문처럼 원의 황실과 혼인한 집안.

 

- 조인규처럼 몽골어를 익혀 통역으로 권세를 누린 사람들.

**조인규: 통역으로 출세했다.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몽골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 결과 통역관으로 발탁되어 원 세조도 감탄할 만큼 이름을 떨쳤다. 이후 조인규 집안은 차츰 명문가가 되어 아들, 사위들이 모두 장군,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권문세족: 문벌 출신이거나 무신 정권 시기에 출세한 가문, 친원 세력으로 이루어졌다.

**경천사지 십층 석탑: 충목왕 4년(1348)에 개경 근교 경천사에 친원 세력이 원의 황제 및 고려 왕실의 번영을 위하여 세운 탑.

 

[사진 4] 경천사지 십층 석탑

 

 

2. 권문세족의 횡포

1) 권력 독점

- 음서를 통해 주요 관직을 차지했다.

 

2) 대규모 농장 경영

-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토지를 빼앗아 대규모농장소유했다.

**농장: 권세가들이 사사로이 차지하고 있던 대규모 토지를 말한다. <고려사>에는 '권문세족의 농장은 산과 하천으로 표시할 정도로 넓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 세금을 내야 할 농민들이 농장 노비전락하여 국가 재정 악화됐다.

 

 

<< Ⅲ. 공민왕의 개혁 정치 >>

1. 배경

중국 내 한족의 반란 등으로 인한 원의 쇠퇴

 

2. 반원 자주 정책

1) 기철 등 친원 세력제거하여 왕권강화했다.

 

2) 친원 세력이 결집해 있던 정동행성이문소폐지했다.

 

3) 의 간섭으로 바뀐 관제폐지하여 고려 제도 복구했다.

 

4) 변발 등의 몽골풍금지했다.

 

5)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회복했다.(1356)

 

 

3. 내정개혁

1) 전민변정도감 설치

-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켰다.

-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 반환했다.

**전민변정도감: 승려 출신인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2) 성균관 정비

- 유학 교육강화했다.

- 개혁 세력양성했다.

 

 

4. 결과

1) 백성의 지지를 받았으나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다.

 

2) 홍건적왜구의 계속된 침입으로 국력이 약화됐다.

 

3) 개혁을 주도하던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실패했다.

 

 

<< . 새로운 세력의 성장 >>

1. 신진 사대부의 성장

1) 성장

-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2) 사상

- 명분 도덕중시하는 성리학받아들이고 불교배척했다.

 

3 ) 출신

- 주로 지방 출신이며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리진출했다.

 

4) 주장

- 토지 제도개혁을 주장했다.

- 권문세족의 비리를 비판했다.

-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우호 관계유지하자 주장했다.

[사진 5] 신진사대부

 

 

2. 신흥 무인 세력의 성장

1) 배경

- 고려 후기, 홍건적왜구침입이 있었다.

- 홍건적: 두 차례 고려에 침입했다. 한때 개경함락되고 공민왕안동으로 피란을 갔다.

- 왜구: 해안 지방 침략하여 고려에 큰 피해 줬다.

 

2) 대표 신흥 무인 세력

- 최영과 이성계: 왜구를 홍산과 황산에서 격퇴했다.

- 최무선: 화포 제작, 화통도감 설치건의했다.

- 박위: 전함을 이끌고 쓰시마섬토벌했다.

 

 

<<.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

1. 위화도 회군

1) 배경

- 이 14세기 중엽 원을 몰아내고 중국 차지.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 통보했다.

 

2)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

- 이성계요동 정벌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의 명령에 따라 요동으로 출정했다.

 

-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개경으로 군대돌려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사진 6]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3) 과전법 실시(1391)

- 권문세족의 사원이 소유한 농장혁파했다.

 

- 신진 사대부에게 토지지급하여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과전법: 경기 지역의 토지에 한해 관직 복무 대가로 수조권(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2. 고려의 멸망(1392)

1) 신진 사대부의 분열

-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개혁 방향을 두고 분열했다.

 

- 이색, 정몽주 등: 고려 왕조를 유지한 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정도전, 조준 등: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2) 온건파 제거

- 정도전 등의 급진파가 정몽주 등의 온건파 제거했다.

 

 

3) 고려 멸망

-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와 손잡고 조선 건국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 어린이 백과(천재 학습백과, 한국사 사전 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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