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원의 내정 간섭>>
1. 원 간섭기 고려의 상황
1) 몽골과의 전쟁이 끝난 후 독립국 지위 유지했지만 원의 내정 간섭이 시작됐다.
2) 원은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인정했다.
→ 고려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2. 원의 부마국이 된 고려
1) 고려 왕실의 호칭과 관제 격하
- 왕의 묘호인 종·조를 '왕'으로 고치게 했다.
**묘호: 황제나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호.
-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자를 앞에 붙였다.
→ 충렬왕, 충선왕 등
- 관직 이름의 격이 낮아졌다.
→ 중추원→밀직사, 어사대→감찰사, 6부→4사
**부마국: 부마는 임금이 사위를 뜻하는 말. 세자가 원의 공주와 혼인하여 고려 왕은 원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2) 영토 상실
- 고려 북방 지역에 쌍성총관부·동녕부,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했다.
**탐라총관부: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하고 설치.
3) 일본 침략에 동원
- 일본 침략에 고려의 배와 물자를 요구했고, 군대가 동원됐다.
**일본 침략: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태풍 등으로 실패.
- 정동행성을 설치했다. → 일본 침략 후에는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데 이용됐다.
**정동행성: 충렬왕 6년(1280)에 원이 일본을 침략하고자 고려의 개경에 설치한 기구. 일본 침략 계획을 그만둔 뒤로는 원의 관리를 두어 고려의 내정을 감시하고 간섭하였다.
4) 물적·인적 자원 수탈
- 물적 수탈: 원은 고려에 금, 은, 인삼, 매 등 특산물을 강제로 징수했다.
- 인적 수탈: 고려의 처녀를 공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했다.
5) 고려와 원의 문물 교류
- 몽골풍: 고려에 몽골어, 몽골식 복장과 머리 모양 등 몽골의 풍습이 유행했다.
- 고려양: 몽골에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 고려의 풍습을 전래했다.
**몽골풍: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 글자 '치'에서 유래한 벼슬아치와 장사치, 몽골 궁중 용어의 왕에게 올리는 밥을 뜻하는 수라, 궁중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종을 뜻하는 무수리 등이 사용되었고, 몽골 음식 중 만두, 소주 등이 고려에 소개되었다.
<< Ⅱ. 권문세족의 성장>>
1. 친원 세력의 등장
1) 배경
- 원 간섭기 원의 힘을 배경으로 권세를 누리는 지배 세력이 등장했다.
2) 출신
- 몽골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
- 고려 왕자가 원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함께 생활하였던 사람들.
- 응방의 관리 등 원과 관련된 일을 하던 사람들.
**응방: 원에 바칠 매를 사육하던 기관.
- 기철의 가문처럼 원의 황실과 혼인한 집안.
- 조인규처럼 몽골어를 익혀 통역으로 권세를 누린 사람들.
**조인규: 통역으로 출세했다.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몽골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 결과 통역관으로 발탁되어 원 세조도 감탄할 만큼 이름을 떨쳤다. 이후 조인규 집안은 차츰 명문가가 되어 아들, 사위들이 모두 장군,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권문세족: 문벌 출신이거나 무신 정권 시기에 출세한 가문, 친원 세력으로 이루어졌다.
**경천사지 십층 석탑: 충목왕 4년(1348)에 개경 근교 경천사에 친원 세력이 원의 황제 및 고려 왕실의 번영을 위하여 세운 탑.
2. 권문세족의 횡포
1) 권력 독점
- 음서를 통해 주요 관직을 차지했다.
2) 대규모 농장 경영
-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했다.
**농장: 권세가들이 사사로이 차지하고 있던 대규모 토지를 말한다. <고려사>에는 '권문세족의 농장은 산과 하천으로 표시할 정도로 넓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 세금을 내야 할 농민들이 농장의 노비로 전락하여 국가 재정이 악화됐다.
<< Ⅲ. 공민왕의 개혁 정치 >>
1. 배경
중국 내 한족의 반란 등으로 인한 원의 쇠퇴
2. 반원 자주 정책
1)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2) 친원 세력이 결집해 있던 정동행성이문소를 폐지했다.
3) 원의 간섭으로 바뀐 관제를 폐지하여 고려의 제도를 복구했다.
4) 변발 등의 몽골풍을 금지했다.
5)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회복했다.(1356)
3. 내정개혁
1) 전민변정도감 설치
-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켰다.
-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반환했다.
**전민변정도감: 승려 출신인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2) 성균관 정비
- 유학 교육을 강화했다.
- 개혁 세력을 양성했다.
4. 결과
1) 백성의 지지를 받았으나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다.
2)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된 침입으로 국력이 약화됐다.
3) 개혁을 주도하던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실패했다.
<< Ⅳ. 새로운 세력의 성장 >>
1. 신진 사대부의 성장
1) 성장
-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2) 사상
- 명분과 도덕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불교를 배척했다.
3 ) 출신
- 주로 지방 출신이며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리로 진출했다.
4) 주장
-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
- 권문세족의 비리를 비판했다.
-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명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자 주장했다.
2. 신흥 무인 세력의 성장
1) 배경
- 고려 후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 홍건적: 두 차례 고려에 침입했다. 한때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란을 갔다.
- 왜구: 해안 지방을 침략하여 고려에 큰 피해 줬다.
2) 대표 신흥 무인 세력
- 최영과 이성계: 왜구를 홍산과 황산에서 격퇴했다.
- 최무선: 화포를 제작, 화통도감 설치를 건의했다.
- 박위: 전함을 이끌고 쓰시마섬을 토벌했다.
<< Ⅴ.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
1. 위화도 회군
1) 배경
- 명이 14세기 중엽 원을 몰아내고 중국을 차지.
→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 통보했다.
2)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
-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의 명령에 따라 요동으로 출정했다.
-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개경으로 군대를 돌려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3) 과전법 실시(1391)
- 권문세족의 사원이 소유한 농장을 혁파했다.
- 신진 사대부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과전법: 경기 지역의 토지에 한해 관직 복무 대가로 수조권(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2. 고려의 멸망(1392)
1) 신진 사대부의 분열
-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개혁 방향을 두고 분열했다.
- 이색, 정몽주 등: 고려 왕조를 유지한 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정도전, 조준 등: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2) 온건파 제거
- 정도전 등의 급진파가 정몽주 등의 온건파를 제거했다.
3) 고려 멸망
-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와 손잡고 조선을 건국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 어린이 백과(천재 학습백과, 한국사 사전 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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