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1.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
1) 사대 외교
- 명에 조공과 책봉의 형식으로 전개했다.
**조공, 책봉: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일반적인 외교 방식
- 조공: 큰 나라에 예물을 바치는 것 → 경제적·문화적 교류의 통로로 이용했다.
- 책봉: 중국 왕조가 조선 국왕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것 → 조선이 국내 정치 안정과 국가 안전을보장받기 위한 목적이 있다.
**사대교린: 사대는 큰 나라를 섬기는 것. 교린은 이웃 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의미. 조선의 외교 기본 원칙이었다.
2) 교린 외교
- 여진과 일본에 적용했다 → 조선과의 교류를 허용하는 회유책과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는 강경책을 함께 사용했다.
2. 명과의 관계
1) 외교 원칙
- 건국 직후부터 사대 외교를 표방했다.
2) 명과의 관계 변화
- 태조: 정도전과 함께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 명과 갈등을 초래
- 태종 이후: 친선 관계를 유지, 활발한 문화 교류
3) 사절의 교환
- 형태: 매년 정기적·비정기적 사절을 교환했다.
- 목적: 국내 정치 안정과 국가 안전 보장, 선진 문화 수입과 물품 교역을 했다.
3. 여진과의 관계
1) 외교의 기본 원칙
- 목적: 북방의 국경 지방 안정, 영토 확보
- 방법: 회유책과 강경책을 함께 사용하는 교린 외교를 추진했다.
2) 회유책
- 여진족의 귀순 장려: 귀순자에게 관직과 토지를 지급했다.
- 교역 허용: 사절 왕래를 통한 무역과 국경 지방에 무역소를 설치했다.
**무역소 설치: 조선 정부는 경성과 경원 등 국경 지역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여진에 무역을 허용하였다.
3) 강경책
- 국경 지방 침탈 시 군사적 정벌에 나섰다.
- 4군 6진 지역 개척: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가 개척 → 오늘날의 국경선이 확정됐다.
4) 사민 정책과 토관 제도 실시
- 목적: 주민의 자치적 지역 방어 체제 확립하고,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추구했다.
- 사민 정책: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다.
**사민 정책: 조선 정부가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거주민을 동원하는 방어 체제를 마련하고자 충청, 전라, 경상도의 백성을 북방 지역으로 이주시킨 정책.
- 토관 제도: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해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4. 일본과의 관계
1) 외교의 기본 원칙
- 교린 정책 추진
2) 강경책
- 목적: 왜구의 침략을 근절하기 위한 것.
- 쓰시마섬 토벌: 세종 때 이종무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했다.
**왜구: 14세기 일본에서 내란이 일어나 지방을 통제하지 못하자 생활이 어려운 섬 지역의 일본인들이 왜구가 되어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노략질하였다.
**쓰시마섬 토벌: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의 토벌은 고려 말부터 이어졌는데, 고려 말 창왕 때에는 박위, 조선 태조 때에는 김사형이 각각 토벌에 나섰다.
3) 회유책
- 배경: 왜구의 침략 진정, 일본의 평화적 교류 요구가 있었다.
- 내용: 3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방하여 무역 허용, 계해약조를 체결했다.(1443) →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했다.
**계해약조: 세종 때 조선 정부의 변효문이 쓰시마섬 도주와 세견선 파견 등 무역에 대해 맺은 조약.
4. 동남아시아와의 교류
1) 대상국
- 류쿠, 시암, 자와 등
**류쿠: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섬에 있었던 나라로, 19세기 후반 일본의 침략을 받아 일본 영토가 되었다.
2) 교류 내용
- 각종 토산물을 가져와 조선의 옷감, 문방구 등과 교역했다.
<< Ⅱ. 임진왜란의 전개와 영향>>
1. 임진왜란의 전개
1) 배경
- 일본의 무역 확대 요구와 조선의 무역 통제 입장의 대립 → 3포 왜란(중종, 1510)과 을묘왜변(명종, 1555) 발생했다.
**3포 왜란: 일본에 개방했던 3포에서 일본인들이 난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국방 문제를 논의하는 임시 기구인 비변사를 설치했다.
**을묘왜변: 일본인들이 70여 척의 배를 동원하여 전라도 연안 지방을 습격한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비변사가 상설 기구로 발전하였고, 이후 일본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2) 임진왜란의 발발(1592)
- 일본군의 조선 침략 → 전쟁 초기 관군의 잇따른 패배 → 선조가 의주로 피란하면서 명에 지원군 요청
3) 수군과 의병의 활약
- 수군: 이순신의 남해 제해권 장악 → 곡창 지대(전라도) 보호 및 일본군의 작전 저지
**일본군의 작전: 바다를 통해 무기와 식량을 조달하려 했다.
- 의병: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익숙한 지형과 그에 맞는 전술을 활용하여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다.
4) 전세의 역전
- 관군의 재정비, 명의 지원군 도착 →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평양성 탈환, 일본군을 경상도 해안 지방까지 밀어냈다.
**명 지원군: 명은 일본이 자국을 침략할 것을 우려해 조선에 지원군을 보냈다.
5) 휴전 회담
- 일본군의 제의로 휴전 회담을 진행했다.
6) 정유재란의 발생(1597)
- 3년간의 휴전 회담 결렬 → 일본군의 재침략 → 직산 전투·명량 해전에서 일본군 격퇴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일본군 철수
**명량 해전: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일본의 대함대를 물리친 전투.
2. 임진왜란의 영향
1) 조선
- 인구 감소: 많은 사람이 전쟁 중 목숨을 잃거나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 백성의 생활 궁핍: 농경지의 황폐화 → 식량 부족 초래
- 국가 재정 궁핍: 토지 대장과 호적 소실 →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 신분제 동요: 전쟁에 공을 세운 상민이나 노비의 신분 상승 등
- 문화재 소실: 불국사와 사고 등이 불타고 도자기, 그림 등이 일본에 약탈 당했다.
2) 명
- 임진왜란 참전으로 많은 군사를 잃고 전쟁 비용을 부담했다. → 국력이 쇠퇴했다.
3) 여진
- 누루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4) 일본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개창했다. 조선에 끌고 간 학자와 기술자, 약탈한 문화재를 바탕으로 문화 발전했다.
**일본 문화 발전: 도자기 문화와 성리학이 크게 발달했다.
<< Ⅲ. 청의 침략과 극복 >>
1. 광해군의 전후 복구 사업과 중립 외교
1) 배경
- 임진왜란 이후 명이 약화되고,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했다.(1616)
2) 광해군의 정책
- 전후 복구 사업: 토지 대장과 호적을 작성해 재정 수입을 확대했다.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해 국방을 강화했다.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했고, <동의보감>을 편찬했다.
**대동법: 집집마다 토산물로 내던 공물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 무명이나 베, 동전 등으로 내게 한 제도. 광해군 때 경기도에 처음 시행.
**동의보감: 허준이 지은 의학 서적으로 동아시아의 의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중립외교: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전개했다.
**중립외교: 명이 후금과의 전쟁을 위해 지원군을 요청하자, 광해군은 강홍립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면서 상황에 맞게 행동하도록 지시하였다. 강홍립은 상황이 어렵게 되자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은 후금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2. 정묘호란(1627)
1) 배경
-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의 친명배금 정책, 명과의 교역 중단에 따른 후금의 경제적 어려움, 명군의 가도 주둔 등이 있다.
**인조반정: 서인 세력이 명을 배신하고 동생인 영창 대군을 죽였으며 인목 대비를 폐위시켜 불효하였다는 이유로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고 인조를 새 왕으로 올린 사건.
**친명배금: 명과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한다
**명군의 가도 주둔: 명의 장수 모문룡이 이끄는 명의 군사가 압록강 입구의 가도에 주둔하여 후금의 배후를 위협했다.
2) 전개
- 후금이 황해도 평산까지 진격해 화의를 성립했다.(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3. 병자호란(1636)
1) 배경
-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 → 조선에서 주화론과 주전론이 대립 → 주전론이 우세 → 청의 요구를 거절
**주화론: 청의 요구를 일단 받아들여 전쟁을 피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
**주전론: 전쟁을 해서라도 청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
2) 전개
- 청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략 →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 → 삼전도에서 청에 굴복했다.
3) 결과
- 청과 군신 관계를 체결했고, 세자를 비롯한 많은 신하와 백성이 청으로 끌려갔다.
4. 북벌 운동의 전개
1) 청과의 관계
- 표면적으로는 군신 관계, 실질적으로는 청을 정벌하여 치욕을 씻어야 한다며 북벌 운동을 전개했다.
**치욕: 지배층은 오랑캐로 여기던 청에 패배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2) 북벌론의 전개
- 효종 때 가장 왕성하게 추진됐다.(송시열·송준길·이완 중심, 군대 양성과 성곽 수리 등 군사력을 강화) → 청의 융성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원형백과(상인과 상업활동)
학생백과(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어린이 백과(실록 밖으로 나온 세종의 비밀일기,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
두산백과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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