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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본(4.5.6급)

[한능검 기본] 14 조선 전기의 대외 관계와 양 난

by tory_write 2021. 10. 24.

<< Ⅰ.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1.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

1) 사대 외교

- 조공 책봉의 형식으로 전개했다.

**조공, 책봉: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일반적인 외교 방식

 

- 조공: 큰 나라예물을 바치는 것 경제적·문화적 교류의 통로로 이용했다.

 

- 책봉: 중국 왕조가 조선 국왕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것 조선이 국내 정치 안정국가 안전보장받기 위한 목적이 있다.

 

**사대교린: 사대는 큰 나라를 섬기는 것. 교린은 이웃 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의미. 조선외교 기본 원칙이었다.

 

 

2) 교린 외교

- 여진일본에 적용했다 조선과의 교류를 허용하는 회유책과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는 강경책함께 사용했다.

 

[사진 1] 조선 초기 대외 관계

 

 

 

2. 명과의 관계

1) 외교 원칙

- 건국 직후부터 사대 외교를 표방했다.

 

 

2) 명과의 관계 변화

- 태조: 정도전과 함께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명과 갈등을 초래

 

- 태종 이후: 친선 관계를 유지, 활발한 문화 교류

 

 

3) 사절의 교환

- 형태: 매년 정기적·비정기적 사절교환했다.

- 목적: 국내 정치 안정과 국가 안전 보장, 선진 문화 수입과 물품 교역을 했다.

 

 

 

3. 여진과의 관계

1) 외교의 기본 원칙

- 목적: 북방국경 지방 안정, 영토 확보

- 방법: 회유책과 강경책을 함께 사용하는 교린 외교를 추진했다.

 

 

2) 회유책

- 여진족의 귀순 장려: 귀순자에게 관직토지했다.

 

- 교역 허용: 사절 왕래를 통한 무역과 국경 지방무역소를 설치했다.

**무역소 설치: 조선 정부는 경성과 경원 등 국경 지역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여진에 무역을 허용하였다.

 

 

3) 강경책 

- 국경 지방 침탈군사적 정벌에 나섰다.

- 4군 6진 지역 개척: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가 개척 오늘날국경선이 확정됐다.

 

[사진 2] 4군 6진 개척

 

 

4) 사민 정책과 토관 제도 실시

- 목적: 주민의 자치적 지역 방어 체제 확립하고, 국토균형적 발전을 추구했다.

 

- 사민 정책: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다.

**사민 정책: 조선 정부가 여진 침략대비하기 위해 거주민동원하는 방어 체제를 마련하고자 충청, 전라, 경상도의 백성을 북방 지역으로 이주시킨 정책.

 

- 토관 제도: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해 민심수습하려 했다.

 

 

 

4. 일본과의 관계

1) 외교의 기본 원칙

- 교린 정책 추진

 

2) 강경책

- 목적: 왜구침략근절하기 위한 것.

- 쓰시마섬 토벌: 세종이종무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정벌했다.

 

**왜구: 14세기 일본에서 내란이 일어나 지방을 통제하지 못하자 생활이 어려운 섬 지역의 일본인들왜구가 되어 한반도중국 해안노략질하였다.

**쓰시마섬 토벌: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의 토벌은 고려 말부터 이어졌는데, 고려 말 창왕 때에는 박위, 조선 태조 때에는 김사형이 각각 토벌에 나섰다.

[사진 3] 세종, 쓰시마 섬 정벌

 

 

3) 회유책 

- 배경: 왜구의 침략 진정, 일본의 평화적 교류 요구가 있었다.

- 내용: 3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방하여 무역 허용, 계해약조체결했다.(1443)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했다. 

**계해약조: 세종 때 조선 정부의 변효문이 쓰시마섬 도주와 세견선 파견 등 무역에 대해 맺은 조약.

 

 

 

4. 동남아시아와의 교류

1) 대상국

- 류쿠, 시암, 자와 등

**류쿠: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섬에 있었던 나라로, 19세기 후반 일본의 침략을 받아 일본 영토가 되었다.

 

2) 교류 내용

- 각종 토산물을 가져와 조선의 옷감, 문방구 등과 교역했다.

 

 

 

<< . 임진왜란의 전개와 영향>>

1. 임진왜란의 전개

1) 배경

- 일본무역 확대 요구조선무역 통제 입장의 대립 3포 왜란(중종, 1510)과 을묘왜변(명종, 1555) 발생했다.

 

**3포 왜란: 일본에 개방했던 3포에서 일본인들이 난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국방 문제를 논의하는 임시 기구인 비변사를 설치했다.

**을묘왜변: 일본인들이 70여 척의 배를 동원하여 전라도 연안 지방을 습격한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비변사가 상설 기구로 발전하였고, 이후 일본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사진 4] 삼포왜란

 

 

2) 임진왜란의 발발(1592)

- 일본군의 조선 침략 전쟁 초기 관군의 잇따른 패배 선조가 의주로 피란하면서 지원군 요청

 

[사진 5] 임진왜란, 일본의 침략

 

 

3) 수군과 의병의 활약

- 수군: 이순신남해 제해권 장악 곡창 지대(전라도) 보호 및 일본군의 작전 저지

**일본군의 작전: 바다를 통해 무기와 식량을 조달하려 했다. 

 

- 의병: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익숙한 지형과 그에 맞는 전술을 활용하여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다.

[사진 6] 임진왜란 주요 전투

 

4) 전세의 역전

- 관군의 재정비, 지원군 도착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평양성 탈환, 일본군을 경상도 해안 지방까지 밀어냈다.

 

**명 지원군: 명은 일본이 자국을 침략할 것을 우려해 조선에 지원군을 보냈다. 

 

 

5) 휴전 회담

- 일본군제의로 휴전 회담을 진행했다.

 

 

6) 정유재란의 발생(1597)

- 3년간의 휴전 회담 결렬 일본군의 재침략 직산 전투·명량 해전에서 일본군 격퇴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일본군 철수

**명량 해전: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일본의 대함대를 물리친 전투.

 

 

 

2. 임진왜란의 영향

1) 조선

- 인구 감소: 많은 사람이 전쟁 중 목숨을 잃거나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 백성의 생활 궁핍: 농경지의 황폐화 식량 부족 초래

 

- 국가 재정 궁핍: 토지 대장과 호적 소실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 신분제 동요: 전쟁에 공을 세운 상민이나 노비의 신분 상승

 

- 문화재 소실: 불국사사고 등이 불타고 도자기, 그림 등이 일본에 약탈 당했다.

 

 

2) 명

- 임진왜란 참전으로 많은 군사 잃고 전쟁 비용을 부담했다. 국력 쇠퇴했다.

 

 

3) 여진

- 누루하치가 여진족통일하여 세력확대했다.

 

 

4) 일본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개창했다. 조선에 끌고 간 학자와 기술자, 약탈한 문화재를 바탕으로 문화 발전했다.

**일본 문화 발전: 도자기 문화와 성리학이 크게 발달했다. 

 

 

 

 

<< Ⅲ. 청의 침략과 극복 >>

1. 광해군의 전후 복구 사업과 중립 외교

1) 배경

- 임진왜란 이후 약화되고, 누르하치가 후금건국했다.(1616)

 

 

2) 광해군의 정책

- 전후 복구 사업: 토지 대장호적을 작성해 재정 수입확대했다.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해 국방강화했다.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했고, <동의보감>을 편찬했다.

**대동법: 집집마다 토산물로 내던 공물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 무명이나 베, 동전 등으로 내게 한 제도. 광해군 때 경기도에 처음 시행.

**동의보감: 허준이 지은 의학 서적으로 동아시아의 의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중립외교: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전개했다.

**중립외교: 명이 후금과의 전쟁을 위해 지원군을 요청하자, 광해군은 강홍립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면서 상황에 맞게 행동하도록 지시하였다. 강홍립은 상황이 어렵게 되자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은 후금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사진 7] 광해군, 중립외교

 

 

2. 정묘호란(1627)

1) 배경

-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친명배금 정책, 명과의 교역 중단에 따른 후금경제적 어려움, 명군의 가도 주둔 등이 있다.

 

**인조반정: 서인 세력이 명을 배신하고 동생인 영창 대군을 죽였으며 인목 대비를 폐위시켜 불효하였다는 이유로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고 인조를 새 왕으로 올린 사건.

**친명배금: 명과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한다

**명군의 가도 주둔: 명의 장수 모문룡이 이끄는 명의 군사가 압록강 입구의 가도에 주둔하여 후금의 배후를 위협했다.

[사진 8] 인조반정

 

 

2) 전개

- 후금황해도 평산까지 진격해 화의를 성립했다.(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3. 병자호란(1636)

1) 배경

-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 조선에 군신 관계요구 조선에서 주화론주전론이 대립 주전론이 우세 요구거절

**주화론: 청의 요구를 일단 받아들여 전쟁을 피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

**주전론: 전쟁을 해서라도 청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

 

2) 전개

- 청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략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 삼전도에서 청에 굴복했다.

 

[사진 9]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3) 결과

- 군신 관계체결했고, 세자를 비롯한 많은 신하와 백성이 청으로 끌려갔다.

 

 

 

4. 북벌 운동의 전개

1) 청과의 관계

- 표면적으로는 군신 관계, 실질적으로는 청을 정벌하여 치욕을 씻어야 한다며 북벌 운동전개했다.

**치욕: 지배층은 오랑캐로 여기던 청에 패배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2) 북벌론의 전개

- 효종 때 가장 왕성하게 추진됐다.(송시열·송준길·이완 중심, 군대 양성과 성곽 수리 등 군사력을 강화) 청의 융성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원형백과(상인과 상업활동)

학생백과(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어린이 백과(실록 밖으로 나온 세종의 비밀일기,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

두산백과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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